사무엘 베케트 _권혜경

"살아온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충분치 않아"라는 블라디미르의 말처럼,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 적어도 자신이 살아왔음을 인정받기 위해 - 부단히, 그리고 애써 '말'을 찾는 지도 모른다. 베케트의 극에 등장하는 목소리들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 바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말이 인간에게 가해진 '덫'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언술 행위 자체의 실제적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침묵하고 있을 수 없다. 이는 인간에게 부과된 또 다른 아이러니라고 하겠다. 그러나 곧 긴 침묵이 돌발적으로 찾아오고, 그들은 그 침묵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이다. 

      [긴 침묵.]
블라디미르: 뭐라고 말 좀 해!
에스트라공: 애쓰고 있잖아.
      [긴 침묵.]
블라디미르: [고뇌에 차서.] 제발 아무 얘기라도 해봐!

침묵이 찾아들어 그들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젖도록 만들까봐, 다시 말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게 될까봐 그들은 두렵다. 생각이나 인식은 그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끔찍한 것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라는 블라디미르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뭔가를 내뱉음으로써 생각에 잠기는 것을 피하는 것, 그리하여 그들은 필사적으로 말에, 그리고 목소리에 매달린다.

-

위니가 자신의 경험을 '하루'로 만들고자 하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은 질서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며, 시간 체계가 없는 세계 속에서 인간은 자신만의 패턴을 부여하게 된다. . . .  그녀[위니]는 자신의 하루를 만들어감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플롯처럼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을 부여하고자 한다. _유진 웹(Eugene Webb)
베케트는 이 극에서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벨'이라는 극적 장치를 사용함으로써, '하루'라는 틀을 애써 만들려고 하는 위니의 노력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역설적 상황을 제시한다.


파라솔 폭발은 잠시 안일한 일산의 축복에 젖었던 위니로 하여금 다시 가혹한 현실로 눈을 돌리게 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베케트는 파라솔 폭발 직전에 두 번의 [최대한의 휴지.](maximum pause)를 두어 직 후에 오는 파라솔 폭발의 효과를 극대화시킴은 물론, 작품 전체에 있어 이사건이 차지하는 깊은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파라솔의 폭발은 곧 우리 주변 어느 곳에나 존재하며 도 어느때나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삶의 부조리로 볼 수 있으며, 이는 또한 우리의 합리적인 이해 - 위니가 이야기 하듯 '자연 법칙'으로 대변되는 - 를 넘어서는 불가해한 성질의 것이다. 파라솔 폭발 후 위니는 변화없는 삶에 대한 무기력함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위니: 그래, 뭔가 일어난 것 같았는데, 무슨 일인지 일어난 것 같았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났군요, 전혀 아무런 일도. 당신 말이 맞군요, 윌리. [휴지.] 내일이면 양산이 여기 이 둔덕 위에 다시 있을 거야, 내가 하루종일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겠지. [휴지. 그녀가 거울을 집어든다.] 내가 이 거울을 들어 돌에다 깨버리고 - [그렇게 한다] - 멀리 던져버려도 - [뒤쪽 멀리 집어던진다.] -내일이면 다시 내 가방 속에 들어있겠지. 흠집하나 없이, 그래서 내가 하루를 보내는 걸 도와주겠지. [휴지.] 없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휴지.] 바로 그게 내가 발견한 멋진 세상의 이치라는 거지 ... [목소리가 가라앉고 머리를 떨군다.] ... 그 이치라는 게 ... 참으로 놀라워. [긴 휴지, 머리를 떨군다.]

-

베케트의 극에서 나타나는 기억은, '무의식적인 기억'에 의해 과거가 복원됨으로써 불완전한 현재는 소거되고 완전한 현존에 도달하게 되는 푸루스트의 경우와는 달리, 항상 불확실한 대상이며 현재에 의해, 또는 시간에 의해 끝없이 왜곡되는 대상이다.

만일 어둠만 있다면 모든 것이 분명할 것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불가해한 것은 어둠뿐만 아니라 빛이 있기 때문이다. . . . 내 극작품의 키워드는 '아마도'(perhaps)이다. 

젊은 시절 그토록 집착했었던 "껍지리에서 알맹이를 골라내기"에 부합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인생 중 의미 깊다고 생각되는 항목들을 기록해 두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침식당한 크랩의 기억력은 그가 생각한 원래의 의도를 따라잡지 못함으로써 인간의 유한함을 더욱 더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히려 노년의 크랩을 보다 사로잡는 것은 '껍질'에 불과했던 주변주 기억들이며, 그는 젊은 시절에 갖지 못했더 통찰력으로 알맹이와 껍질, 중심의 기억과 주변부의 기억들을 모두 아우르는 확대된 인식의 폭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헛된 반복"이긴 하지만 마지막까지 그에게 남겨진 것은 여전히 그의 기억과 말하기, 곧 글쓰기인 것이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새로운 목소리를 기록하고 또 과거의 목소리를 취사선택하여 재생함으로써 편집자, 더 나아가 작가의 기능을 놓치지 않고 있다. 


by floatingsi | 2012/01/26 10:27 | | 트랙백 | 덧글(0)
소크라테스
변명
나는 그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도 나도 아름다움이나 선을 사실상 모르고 있지만 나는 그보다는 현명하다고.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알지도 못하고 또 안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시인은 지혜가 있어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소질과 영감에 의해 시를 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말을 많이 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예언자나 점쟁이와 같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지혜로움을 가장하는 것이지 진정한 지혜로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체 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최대의 선인지 아닌지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운 나머지 죽음을 최대의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요? 인간으로 하여금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확신하게 하는 무지가 아닐까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하며, 개인적 이익을 구하기에 앞서 덕과 지혜를 추구해야 하고, 국가의 이익을 고려하기에 앞서 국가 자체를 돌보아야 하며, 또한 이것이 인간의 행동에 있어서 지켜야 할 순서라고 여러분 각자에게 설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죽음의 회피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의를 피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크리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그것에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분별력이 있는 한 사람의 교사가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행동하고 훈련하고 먹고 마셔야 하겠지?

우리가 지금 검토하고 있는 문제인 정의와 부정, 미와 추, 선과 악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고 그 의견을 두려워해야 할까? 아니면 분별력이 있는 한 사람의 의견을 따르고 그 의견을 두려워해야 할까?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그를 더 두려워하고 존경해서는 안되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를 버린다면, 우리는 정의에 의해서는 향상되고 부정에 의해서는 퇴폐된다고 생각되어 온 우리의 원칙을 파괴하고 손상시킬 것이 아닌가?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인정하는 일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을 속이고 올바른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



파이돈
시인은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단지 낱말을 이어 맞추는 일만 할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네. 그러나 나는 만들어낼 만한 이야기가 없었으므로 친숙하게 알고 있는 이솝의 우화를 택해서 시로 옮겨놓은 것일세.

참된 철학자는 항상 죽음과 죽어가는 것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상기는 대체로 시간이 흐르고 부주의로 말미암아 이미 잊었던 것을 회복하는 과정일세.

그리고 만일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러한 지식을 획득했고 또 나면서부터 이러한 지식을 활용한다면,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그리고 태어나는 순간에, '같다'든가 '보다 크다'든가 '보다 작다'든가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밖의 모든 관념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되네.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것은 대등 자체만이 아니고 아름다움, 선, 정의, 거룩함, 그 밖에 우리가 묻고 대답하는 대화 과정에서 본질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야.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지식을 얻었다고 확실히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만일 지식을 얻은 다음에 우리가 각각의 경우에 획득한 것을 망각하지 않는 다면 우리는 언제나 지식을 갖고 태어나서 생명이 있는 한 언제나 계속해서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될거야. 안다는 것은 지기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망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야. 심미아스, 망각은 바로 지식의 상실이라는 뜻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얻은 지식을 태어날 때에 상실하고, 그후에는 감각을 사용하여 이전에 알고 있는 것을 회복한다면 우리가 학습이라고 부르는 과정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던 지식을 회복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 과정을 상기라고 불러도 잘못은 아니겠지?
by floatingsi | 2012/01/18 23:10 | | 트랙백 | 덧글(0)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는 어떤 팽팽한 밧줄에 몸을 의지하고 제어할 수 없이 광분하는 바다의 온갖모습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 속에서 일종의 환호성이 일어났는데, 그에게는 마치 그 환호성이 폭풍과 밀물을 압도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 같았다. 사랑에 감격하여 바다에 바치는 한 노래가 그의 마음 속에서 울려나왔다. 그대, 내 젊음의 야성적 친구여, 언젠가 우리 아직 한 몸이었건만, 그러나 그것으로 그 시는 그만 끝이었다. 그것은 완성되지 못했고 완결된 형식을 얻지 못했으며 냉정한 가운데에 무엇인가 완전한 것으로 빚어지지 못했다. 그의 마음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자베타, 어느 땐가 나를 가리켜 시민이라고, 길 잃은 시민이라고 말한 것을 아직도 기억하겠지요? 당신이 나를 그렇게 부른 것은 내가 그전에 부주의하게 입 밖에 흘렸던 다른 고백들에 유발되어 내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내 사랑을 당신에게 고백한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당신이 자신의 그 말이 얼마나 진실에 적중했는지를 알았을까, 그리고 나의 시민성이 <삶>에 대한 나의 사랑과 완전히 동일하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었을까 하고 나는 자문해 봅니다. 이번 여행은 나에게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나의 선친은 북쪽 기질이셨지요. 청교도 정신에서 유래하는 명상적이고 철저하며 정확한 성품이셨고 우수에 잠기곤 하셨지요. 불확실한 이국적 혈통을 물려받으신 제 어머니는 아름답고 관능적이고 소박한 동시에 태만하고 정열적이었으며 충동적 방종성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이것이 비상한 가능성들-그리고 비상한 위험성들-을 내포한 혼혈인 것은 전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 혼혈에서 생겨난 것이 바로 예술의 세계 속으로 길을 잃은 시민, 훌륭한 가정 교육에 대한 향수를 지닌 보헤미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예술가입니다. 정말이지 나로 하여금 모든 예술성 속에서, 모든 비상한 것과 모든 천재성 속에서 무엇인가 매우 모호한 것, 매우 불명예스러운 것, 매우 의심스러운 것을 알아차리도록 해주는 것은 바로 이 시민적 양심이며, 나라는 인간의 내부를 단순한 것, 진심인 것, 유쾌한고 정상적인 것, 비천재적인 것, 단정한 것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는 것도 바로 이 시민적 양심인 것입니다.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약간 견디기가 어렵지요.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기게 됩니다. 이 둘 중 어느쪽이 더 나의 마음에 쓰라린 모욕감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민들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나 나를 가리켜 냉정하다거나 동경이 없다고 말하는 당신들 미의 숭배자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세상에는 애초부터, 운명적으로 타고난 모종의 예술가 기질도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떤 동경보다도 일상성의 환희에 대한 동경을 가장 달콤하고 가장 느낄만한 동경으로 여기는 그런 심각한 예술가 기질 말입니다.
나는 위대하고도 마성적인 미의 오솔길 위에서 모험을 일삼으면서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하고 냉철한 자들에게 경탄을 불금합니다. 그러나 난 그들을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한 문사를 진정한 시인으로 만들 수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것, 생동하는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나의 이러한 시민적 사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온정, 모든 선의, 그리고 모든 유머는 이 사랑으로부터 유래합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사랑이 <사람이 인간과 천사의 혀로 말할 수 있다 해도 이것이 없다면 단지 소리내는 쇠붙이나 울리는 방울에 지나지 않느니라>라고 성경에 씌어 있느 바로 그 사랑인 것처럼 생각될 정도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룩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별로 많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리자베타, 나는 더 나은 것을 만들어보겠습니다. - 이것은 일종의 약속입니다.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동안, 바다의 물결 소리가 내게까지 올라옵니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습니다. 그러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있는 한 세계가 들여다보입니다. 그 세계는 나한테서 질서와 형상을 부여받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또한, 나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허깨비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들은 부디 마법을 걸어 자기들을 풀어달라고 나에게 손짓하고 있습니다. 비극적인 허깨비들과 우스꽝스러운 허깨비들, 그리고 비극적인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허깨비들인데, 나는 이것들에게 큰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 있는 아무도 모르는 나 혼자만의 사랑은 금발과 파란 눈을 하고 있는 사람들, 생동하는 밝은 사람들,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일상적인 사람들에게 바쳐진 것입니다.
라자베타, 이 사랑을 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선량하고 생산적인 사랑입니다. 동경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울한 질투와 아주 조금의 경멸과 완전하고도 순결한 천상적 행복감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 토니오 트뢰거 중

by floatingsi | 2011/12/28 12:36 | | 트랙백 | 덧글(0)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desire * 2 0 1 1 www.floatingsi.com
카테고리
일상
작업

단어
여행
최근 등록된 덧글
블라디미르: "습관은 굉장..
by floatingsi at 01/26
진정한 인간적인 감정이..
by neobluejin at 12/13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
by floatingsi at 12/03
추워지니깐 움직이기 더..
by floatingsi at 11/28
다른곳
라이프로그
침묵과 소리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
침묵과 소리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

존 던의 거룩한 시편
존 던의 거룩한 시편

소크라테스의 변명
소크라테스의 변명

향연
향연

rss

skin by 철이